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본당 출신 성직자인,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께서 최근 본당을 방문하셨습니다.
20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교중미사를 김 신부께서 본당 주임신부와 공동 집전하셨습니다.
미사 중에 하신 김 신부의 강론을 공유합니다.

중간 제목은 알아보기 쉽도록 편집자가 추가하였습니다.
△ 김 그레고리오 신부와 인터뷰 보기로 이동


‘그리스도 왕’이라고 그러죠.
하느님 왕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 왕이라고 하지 않고, 성자 왕이라고 그러지 않고 ‘그리스도 왕’  그래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제2 위격이신 예수님을 가르키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아들’, (다른) 하나는 그냥 ‘아들’.
‘사람의 아들’은 그 인성까지 포함해서 취하신 그걸 가르키는 데 쓰는 말이고, ‘아들’은 그 영원하신 실체, 그걸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고 하면, 그 사람 전체의 사람이자 하느님이신 그 전체를 가르키는 말이죠.
이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은 노력을 해야 하죠. 그냥 거져 주는 건 없죠. 세상에 공짜는 없죠. 뭘 사려면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 하고요. 또 자녀를 위해서 뭔가를 사 주려면, 우리는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요.

십자가 패전 승리

그리스도께서도 왕권을 그냥 차지하신 게 아닙니다.
묵시록에 보면은 나오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부귀와 영예와 지혜와 영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고요.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왕권의 특수성이 나타나는데요.
그 특수성은 무엇일까요?

보통 정치 권력이나 무언가를 얻으려면 승리를 해야 되죠.
승전, 승전으로써 승리를 하고, 그 승리로써 무언가를 획득하는데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보듯이 ‘십자가 패전 승리’를 하십니다.
패전하심으로써 승리를 얻으십니다.

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

무한한 권능

참 신비로운 기록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왕권이 바로 신비로운 왕권(임을)을 가르키죠.
그런데 이 신비로운 왕권에 또 하나의 성질이 오늘 복음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한한 권능’입니다.

아니, 여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어떻게 우리가 무한하신 권능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 누가 나의 원수인가?
  • 누가 어떻게 해서 나의 원수가 되었느냐?
  • 어떻게 어떤 행위나 말을 하니까 좀 나한테 해가 되었으냐? 또는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 왜 나의 원수가 되었는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 십자가 옆 한 강도는) 내 자신이 내 구원의 부하이고, 구원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잘못돼 있어요.
신체적인 구원에 한정돼 있어요.
영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 어떤 사람이 오류를 가지고 있을 때, 무지할 때 , 아니면 사람의 감정, 애정이 잘못되었을 때 이기심, 시기심, 질투, 탐욕 이런 게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게서 (그가) 뭔가를 빼앗으려고 해서,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가) 우리한테 원수가 되는 것이죠.
그 사람 실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고요.

모든 것을 좋게 만드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다 선한데,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생각・애정・습성・습관… 이런 것들로 인하여 우리한테 해를 가해서 그 사람이 (내)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무한한 권능을 어떻게 드러내십니까?
예를 들어 병원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간이 아파요, 여기가요’ 했을 때 의사의 능력은 무엇에서 드러날까요?

손상된 부위를 회복시키시는 권능

의사의 능력은 손상된 신체 부위를 절단하는 데서 드러납니까?
뭔가를 절단하는 것은 의술을 배우지 않는 사람,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죠.
의사의 권능, 영광, 바로 실력은 그 손상된 부위를 회복시키는 데 있죠.

주님께서 우리가 제 기능을 다시 발휘하도록 회복시켜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십니다.
원수, 이런 악인들을 그냥 처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들을 완전히 의인으로 회개시키시는 것, 완전히 변화시키시는 데에 권능이라는 주님의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의 무한한 왕권을 드러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패전하심으로써 그 악인들을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 왕권의 또 하나 특징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 게 요한 기록에서 나오죠.

“그들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혼자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같이 왕이 되게 하시는 (방법으로요) .
어떤 정치 권력자가 권력을 같이 나누고 싶어할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권력을 같이 나눠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요.

그리스도 왕권에 우리들이 참여하는 방법 두 가지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권에 우리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길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는 이런 믿음 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들 잘 아시 듯이 ‘선을 실천하는 것’으로써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게) 나쁜 말을 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나쁘게 응답하지 않고, 좋게 답하는 모습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선한 의지로 해야 합니다.
내가 찬미 받으려고, 내가 무슨 영예를 얻으려고,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내게 좋은 열매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순수한 지향으로 선한 해야 합니다.

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

악을 참아낼 줄 알기

그런데 이것 외에도 아주 더 본질적인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또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악을 참아낼 줄 아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7, 13-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

“저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어보시니까 “주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거대한 환난을 통과하였고”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써 자신의 옷을 희게 만들어”라는 말씀이 나오죠.

어려운 일은 우리 살아가면서 언제든지 닥칩니다.
예기치 않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쁜 소식이 우리 귀를 때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나쁜 소식이 우리 귀를 때릴 때, 우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손길을 항상 기다릴 줄 아는 선한 이 강도처럼요.
이 강도도 고통 안에서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주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반면 다른 강도는 ‘우리도 구원해 보시오’라고 하죠.
이거는 바로 고통을 열매 없게 당하는 모습이에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그 옆의 강도는 열매를 맺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단순히 저를 기억해 달라는 이 말씀으로 거대한 상금을 받는, 바로 이게 우리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고통을 당하더라도 침묵 속에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참아낼 때 우리들은 흰 옷을 가지게 돼요.

기도, 독서, 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가 말하듯이, 위대한 교부가 말하듯이, 기도・독서・일이라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실천하는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사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실천하는 사랑은 이해가 안 될 수 있어요.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이) 이해가 안 되시니까, 우리들한테의 사랑이 어떨 때는 무자비함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강도처럼 그냥 꿋꿋이 가야 합니다, 기도로써요.

그리스도 인은 단순히 달콤한 호의에 머물지 않고 어떨 때는 굳건함도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려면, 무엇이 저 사람에게 좋은지를 알아야 해요.
근데 저 사람이 그 선을 싫어합니다.
그래도 꿋꿋이 기다리면서 그의 손을 잡아 주려고 해야 돼요.

마찬가지로 어떤 병자가 ‘이 약이 써서 싫다’고 해요.
그렇더라도 ‘약 먹지 마!’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좀 달래가면서 약을 주듯이, 우리도 굳건함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저 사람한테 좋은 것은, 저 사람이 좋든 싫든 저 사람한테 좋은 거니까요.

‘사랑의 굳셈’

그래서 성령의 칠은 가운데 굳셈이 있는 겁니다.
사랑은 굳셈이 따릅니다.
사랑을 하려면 굿셈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명쾌함이 있어야 합니다, 명쾌함.
무엇이 좋은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랑이 그리스도 왕권의 참들입니다.
이게 참 사랑입니다.
참 사랑, 단순히 먹고 이런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저 사람한테 좋은 것을 보고 그러면 끝까지 저 사람을 위해서 이걸 주려고 하는 항구함, 이것이 올바른 마음을 가진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성찬의 전례 때 우리도 주님께서 이 빛과 굳건함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러한 빛과 굳건함이 없으면 우리는 이 길을 갈 수가 없어요.

미사를 준비하는 마음

그리고 한 가지 제가 조금 부탁드리고 싶은 거는 미사 시간에 조금 또 일찍 오려고 하는 거. 오늘 좀 늦게 오는 거 봤는데요.
미사 준비와 참례, 이 것도 되게 중요합니다.
왜냐면 영성체도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준비가 있을 때, 우리가 하는 영성체의 효과, 즉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 전부로 퍼져나갈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빛이 단순히 마음에서 뿐만이 아니라, 감각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어요.

영에서 와서 감각으로 퍼져 나가는 기쁨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면 ‘기쁨’이죠.
기쁨, 보통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감각을 통해서 오죠. 무엇을 먹거나 보거나 듣거나를 통해서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기쁨은 전혀 다른 차원인 겁니다.
영에서 와서 감각으로 퍼져나갑니다. 완전히 다른 질서예요. 신비로운 기쁨이고요.

이 기쁨으로 가려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니까요. 항상 기도하면서, 감사드리면서, 신뢰하면서, 침묵하면서 (주님께로 갈 것을) 부탁드립니다. (정리: 홍보분과 박세영 대건안드레아)

김정환 그레고리오 신부
미사 후 축하와 감사의 꽃다발 전달식을 가졌습니다.